주일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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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함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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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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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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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에 선포된 말씀) 2018년 3월 11일

완고함의 고독。

( 눅 15: 22 ~ 32 )


학교 다닐 때는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직장에서는
성실한 직원이라는 좋은 평판을 들었습니다. ▷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도 고독감이 밀려올까요?

열심히 살고 바쁘게 살아간다고 해서 고독감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목표만을 바라보며
집중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일한 사람에게는 그 긴장이 풀렸을 때 공허감이 더 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일과표에 따라 바쁘게 돌아갑니다. 평일에는 회사 일로 바쁩니다. 주말이 되면
가족들의 욕구를 채워주느라 더 피곤합니다. 요즘 한국의 아파트에는 잘 꾸며진 놀이터가 전국
어디에나 있지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다고 합니다. 어린이들도 너무 바쁘니까요.
생일 잔치에 초대를 해도 올 수 있는 친구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아예 새벽부터
학교에 등교해서 밤 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나면 밤 9시가 넘어 집에 귀가합니다.

이민 사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도시에서의 삶은 강한 노동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소도시는 작은 커뮤니티에서 오는 무료함과 지루함이 있습니다. 오락 거리나 어울릴 수 있는 친구도
적습니다. 문화적 욕구도 충족되기 어렵습니다. 잘못된 중독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외롭다고 말하면 주변 친구들은 쉽게 여러가지 권면을 해 줍니다. “클럽에 가입해라. 취미를 가지라.
인생을 즐기라. 일을 시작하라. 적극적이 되어라. 혼자 있지 말아라. 직업을 바꾸라. 여행을 가라.
영화에 빠지라. 문화적인 관심사를 가지라. 오늘부터 당장 배우라. 결혼해라. 재혼해라. 이사해라.
양서를 읽으라. 교회에 나가라. 새로운 목표를 세우라 등등.” 하지만 이런 활동들은 일시적으로
외로움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음 속 깊은 수준에서 흐르고 있는 허전함과 쓸쓸함,
허무함을 근본적으로 치료해 줄 수는 없습니다.

▶ 오늘 본문에는 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 하루 열심히 일했던 큰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했지만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남들은 자신을 향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효자라고 말했고, 한 번도 어긋날 길로 나가지 않았던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들로부터 비난 받을 짓을 하지도 않았고, 교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갔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삶의 짐은 무겁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더 해야 되는지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동생처럼 가출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순종과 효도는 등이 휠 정도로 무거워졌습니다.
섬김은 종살이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규율을 잘 지켰지만 도대체 나에게 돌아온 유익이 무엇인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바르고
착하게 사는 나에게 왜 이렇게 분노가 끓고, 불만이 가득한 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특히 동생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받을 수 있는 유산을 미리 받아서 다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에게 반성 기간을 준 것이 아니라, 잔치를 열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뇌 뚜껑이 열리고 폭발하여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 하나님은 이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하십니다.
혹시 나에게도 기쁨없는 성실성만 있는 것은 아닌지, 감사 없는 신앙은 아닌지 살피라고 하십니다.


1. 나의 봉사와 노력이 ( 보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눅15:29)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잘 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기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실망감을 경험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열심히 봉사하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어려움이 오는데, 그 어려움이란 별 기대없이 교회 오는 분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는 분들로부터 불거져 나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열심 없는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열심이 많은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혹시나 저렇게 열심히 하다가
상처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좋아서 시작한 봉사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이 큰 사랑, 이 큰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하는 마음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떨어진 휴지를 줍습니다.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서 봉사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은 해 본 분들만 압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셨는데,
내가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그런데 봉사하다가 어이 없는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서느냐?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잘 난 줄 알고 설쳐대느냐?” 이런 말을 들으면 현기증이 납니다. 내가 미쳤다고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봉사하는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이 때 주위에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분들은 이런 마음을 잘 이해해 줍니다. 성경 말씀을 나누며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12:2-3)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되는구나~.’ 이런 것을 깨닫고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지!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시작한 봉사 아니던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데, 만약 내가 사람들 말 때문에 포기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다시 힘을 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주위에 이런
신실한 분이 없고,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시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그만두겠다고 하고,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부터 합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왜 잘못한 것이 없겠습니까? 일은 잘 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 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나의 실수를 반성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실까요?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십니다. 슬펐던 마음은
기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지금 큰 아들도 화를 내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아니, 동생이 사람답게 변해서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유산 상속분을 미리 받아가지고, 술집 여자들에게 주고, 흥청망청 다
써버린 동생입니다. 그것도 괘씸한데, 거지 꼴을 하고서 무슨 염치로 다시 들어왔단 말입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망신 망신, 집안 망신도 창피한데, 더구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주책 없이 덩실 덩실 춤추며 기뻐합니다. 춤까지 추었다는 말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집안에 들어가기도 싫습니다. 밖에서 안 들어가겠다고 버팁니다. 아버지는 나와서 큰
아들의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가자고 권유합니다. 우리에게는 큰 아들 심정이 더 이해가 갑니다.
성공하고 돌아온 것도 아니고, 쫄딱 망해서, 오갈 데 없으니 기어 들어온 동생이 뭐 이쁘다고
반기겠습니까? 만약 이 동생이 돈을 벌었다면 과연 집에 돌아오기나 했을까요? 분명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형은 울화통이 터집니다.

▶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동생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이 정말 내가 화를 낼 만큼 나쁜 일입니까?
동생의 귀환이 누구에게 해가 되는 잘못한 범죄입니까? 혹시 동생과는 상관없이 나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데서 오는 분노는 아닐까요? 나는 아버지를 위해 죽도록 일했고,
아버지의 분부라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는, 자기 의에서 비롯된 교만은 아닐까요?
아버지가 나에게 원한 것은 내가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정말 죽도록 일만 하는 것이었을까요?
혹시 나 자신이 이렇게 해야만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까?

♡ 하나님은 우리가 꼭 무엇을 잘 해야만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런 분입니까?
우리가 실수하면 미워하고, 사업에 망하면 실망하시는 그런 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그 자체로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너희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착하기
때문에 구원해 준 것도 아니다. 너희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구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을까요?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엡2:8-9)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방의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에게 이해심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례)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어린이들이 소개됩니다.
부모에게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부모를 장난감 흉기로 협박하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가게마다 진열해 놓은 물건들을 마구 쓰러뜨리면서 민폐를 끼치기도 합니다. 6살 아이가
자기보다 더 어린 두 살짜리 동생을 발로 밟고, 목을 졸라 울음을 터뜨립니다.

처음에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 저는 속으로 분통이 터집니다. 왜 자기 아이를 저렇게 방치해
둘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저지르는 문제 행동의 원인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시간이 갈수록 자녀의 문제행동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다 결국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전문가들이 나와서 아이의 행동을 관찰한
후 문제의 원인을 지적해 줍니다. 그리고 그 원인에 따라서 각기 다른 처방이 내려지면 부모들은
그 다음부터 자녀를 대하는 자신의 행동을 바꿉니다. 그렇게 해서 몇 주가 지나면 몇 년 동안
문제만 일으켰던 아이가 전혀 딴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를 처음 볼 때는 화부터 났습니다.
이것은 그 아이의 심리적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다른 얌전한 아이들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다양한 개성과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 행동은 우리가 그 원인을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화 낼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탕자의 아버지는 두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죄책감에 빠져서 기뻐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도 사랑했지만, 동생의 귀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화를 내는 큰 아들의 심정도
이해했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갔던 작은 아들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맏아들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그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6:36)



2. 누군가와 비교하다가 ( 섭섭 )했던 적은 없는가?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0~32)

큰 아들의 주장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치에 맞습니다. 합리적입니다. 얼굴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졌습니다. 동생에게 가서 손을 내밀지도 않습니다. 웃음 짓지도 않습니다. 반갑다는
표현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손에 있는 지팡이는 바닥까지
곧게 뻗어져 있는데, 그의 완고하고 딱딱해진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반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허리를 굽혀 반겨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반가움의 눈물과 미소로
가득합니다.

▶ 여러분, 큰 아들과 작은 아들 가운데 누가 탕자입니까?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탕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의롭다고 믿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가
남들보다 낫다는 우월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눅18:11)

교회에는 잘 나오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고, 차가운 표정을 하며, 불평을 자주
내뱉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원인에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상관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몸은 피곤한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허전했습니다. 동생보다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회사 생활은 일 벌레처럼, Workaholic처럼
일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뿌듯한 성취감도, 마음의 평안도 없었습니다.

분명 내가 동생보다는 일을 잘 했는데도 그의 내면세계는 쓸쓸했습니다. 허전했습니다. 쫓기는
듯했습니다. 마음이 늘 어딘가에 매여 있는 듯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분주하게 살았지만 불안했습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잘 해내야 된다는
생각에 시달릴수록 더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동생도 경쟁자로 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만 하는 경쟁자. 라이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효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큰 아들은 남들로부터는 칭찬을 들었는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만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내 심령이 왜 이렇게 메말랐을까? 나는 왜 이렇게 만족할 줄 모르고 늘 불평불만이
가득할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심각한 고민을 하나님께 털어놓아야 하는데, 그는 이런
고민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모르는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 교만 때문에
복음을 들어도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모릅니다. 성령의 감화를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선자가
됩니다. 스스로 소외 당했습니다. 고독합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딱딱해 졌습니다. 완고함의
고독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영혼입니까?

아버지는 오랫 동안 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의 심성이 어떤지 잘
압니다.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압니다. 큰 아들은 경제 관념이
분명합니다. 돈 계산에 밝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에 의하면 아들이 둘일 경우, 형은 유산의 3분의
2를 갖고, 동생은 3분의 1를 가집니다. 그런데 동생이 그 유산을 미리 댕겨서 받았으니
이제 아버지의 유산은 모두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모두 내 몫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소를 잡고 잔치를 벌여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 이런 아들의 심리를 아버지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눅15:31)

큰 아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아버지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민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돈 벌기 얼마나 어려운 지도 세밀하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 우리에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우리에게는 노후 준비나 자금도 부족합니다. 자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데, 뒷바라지 하기에
역부족이라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허리띠를 조이고 생활비를 절약해 보지만, 늘 빠듯합니다.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자식에게 큰 부담이 될까 봐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고단하고 외롭습니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우리 마음도 딱딱하게 굳어질
수 있습니다. 혼자서 떠 안아야 하는 부담감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

♡ 우리는 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집 안에 함께 살아도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 자 자신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구제불능 죄인들이었습니다.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주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각 자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섭섭하다고 느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허리를 굽혀서 서로를 섬깁니다. 친절합니다.
상냥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형제 자매가 있다면 두 팔
벌려서 따뜻하게 환영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기 도 ]

하나님,
집을 나갔던 탕자는 돌아왔지만 정작 집 안에 있었던 탕자는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날마다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이러한 불평과 비교 의식, 열등감이 있지는 않은지요?
다른 사람이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시기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들은 경쟁 사회를 살면서 나도 모르게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저희들의 상한 마음을 치료해주시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