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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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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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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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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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에 선포된 말씀) 2018년 2월 25일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 벧전 4: 8 ~ 11 )

현대인들이 원하는 참된 안식은 어디에 가야 얻을 수 있을까요? 몰디브처럼 아름다운 바닷가
휴양지에 가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안식은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즐거운 식탁, 사랑하는 가족, 휴식을 취하는 침대, 곧 가정을 잃어가는 모습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교회에 나와서 찾고 있는 것은 참된
안식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고단한 우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시는 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8-29) 우리가 예수님께 가서 쉼을
얻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 많은 나를 용납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충동이 있고 욕망이 있습니다. 혼돈스럽고 불안하고 고독한 감정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그늘과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어릴 적에는 그림자가 무섭고
두렵지만, 어느 정도 성숙한 성인이 되면 적당한 그늘이 도리어 마음이 편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 오늘날 이 시대는 한 사람의 사생활을 어느 정도 감추어 주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폭로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한병철교수는
『투명사회 Transparenzgesellschaft』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이렇게 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보의 발달과 함께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과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첨단
장비들, 그리고 인격에 대한 배려와 존중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은 정보화 사회의 단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남들로부터 방해받지 않아야 할 프라이버시(Privacy)가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대중 스타라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개인의 은밀한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 주차 위반을 해서 핸드폰으로 경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골목길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잠시 주차했더니 CCTV에서 차
주인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발송하여 5분 내에 차를 이동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한국은
직장에서 퇴근하여 집까지 가는 데에 보통 13군데에서 CCTV에 찍힌다고 합니다. 안전과
증거확보를 위해서 그런다고는 하지만, 감시 받는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어디에 가야 안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들키고 싶지 않은 우리의 ( 허물 )을 하나님은 덮어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벧전4:8)
주님께서 잡히시고 가야바 대제사장 뜰 안에서 재판을 받으시던 날이었습니다. 요한은 뜰 안으로
들어갔지만 베드로는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불러서 따라 들어갔다가 모닥불
앞에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을 받으시면서 그 사람들

2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이 상황을 모면해야만 살 수 있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잡혀서 죽을 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내가 비겁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진실을 말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도 연약했습니다. 목에 힘을 주면서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베드로는 엉엉 울었습니다.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한심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주님은 나를 수제자로 여기고 중요한 장소마다 동행해 주셨건만 그 신뢰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배신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수치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지, 평생 잊지 못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주님은 위기의 순간에도 당당하게 죽음과 맞서 싸우시고 계신데, 나는 아무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배신하는 거짓말만 하다니…. 죄송한 마음에 목 놓아
울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다음 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도 베드로는 멀찍이 서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고, 베드로는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으니까요. 믿음을 배신으로 갚은 사람. 수제자로서 나섰던 인간이 가장 비겁하게
실패하고 추락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한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차가운
바닷가, 이른 새벽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닥불을 보자 예전의
악몽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힘 없는 어깨를 감싸주셨고, 피곤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눈을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병마와 연약함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 실패한 것 때문에 창피를 느끼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지난 날의 실수와 범죄가 발각되어 숨을 곳도 없고 죽고 싶은 심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손길을 펼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용서의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수 신분으로 돌아가셨는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연약하여 비겁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 죄 값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 베드로는 다시 만난 주님을 통해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주님을
미지근하게 사랑했지만, 주님은 나를 뜨겁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미지근한 사랑은 위기를 만나면 도망치지만, 뜨거운 사랑은 위기에서도 용기를 발휘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친한 사이라면 상대방의 죄가 드러났을 때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여전히 수제자로 여기셨고,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위탁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 부끄러움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에, 내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는
그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 관계도 이렇게 풀어나가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찾아내고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우리가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려고
하지 않고 용납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수용하려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다투는 일이 잦아집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부부끼리 싸우는 일이 줄어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잠언10:12)

3

2. 인간은 완벽하거나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면을 ( 이해 )한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눅5:32)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을 가리려고 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창3:7)
근동 지방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으면, 곧
시들어 하루에 두 번 정도 갈아입어야 한답니다. 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엔
어렵다는 것이지요. ▷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창3:21)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던 날의 장면이 나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려고 밤새도록 노렸했지만, 허탕쳤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거듭 거듭 시도해도 정말 안 되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말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처음 고백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
어쩌면 베드로의 이 말은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주님,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 있는 저는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젯밤에도 더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가족들과 요즘 냉전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친구에게 아무 이유없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요즘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며 별의 별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창피하고 한심한 짓을 매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 어쩌면 좋습니까?
내가 왜 이러는지…. 이 부끄러운 감옥에서 저를 구해주세요~.”
요즘 어린이들은 성장과 발육이 빨라져서 보통 4학년이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시피, 사춘기는 자신도 모르는 호기심과 충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어떤 어린이는 인터넷을 하다가 호기심에 클릭 한 번 잘못해서 엄청난 전화비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단 사춘기 청소년만 그럴까요? 40대 중년은 사추기(?)를 앓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많든, 인간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충동과 그림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정죄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셨고, 용서하셨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신앙인들이 아직도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면에서 자주 넘어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실패한다. 종교를 그저 깨끗함, 순결함, 안전한 삶 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흰 천에 까만 얼룩을 묻히는 듯한 감정은 모조리 반종교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강렬한 성 충동과 잔인한 공상과 공격적 욕망을 자신에게 허용할 수 없다. 종교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욕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죽이지 말라. 자위하지 말라. 험담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지
말라……. 이제 예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라는 학교 선생님에게도 반감이 든다. 자기 자신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한없이 외로운 존재로 느낀다. 이 낯선 감정의 내면 세계를 아무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헨리 나우웬, 『친밀함』, 두란노. P. 23-24)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부정하지 않으시고 수용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과 회개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그 눈길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허물을 아시면서도 용서해주시고
싶어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너희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눅5:24)

4
♡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빅터 프랭클은 지금 그의 부족함이나 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소중한 가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믿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긍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만의 고유하고 유일한 본질을 알아보는
것, 즉 그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보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되어야
하는 것까지 함께 봅니다. 그 사람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의 어떤 모습까지
보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반했을 때는 눈이 멀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비로소 눈이 뜨일 뿐 아니라, 멀리 보게 되고
꿰뚫어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존재에게서 더 가치로워질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실현되어야 할 가능성으로 읽어낸다는 뜻입니다.”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의 심리의 발견』, 청아 출판사. P. 111-112)
오늘 우리는 나를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찬예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심으로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을 느끼려고 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면을 이해해주시는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 기 도 ]
하나님,
우리 안에는 아직도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우리 마음에서는 인간적인 욕망과 충동들이 파도처럼 일어나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인간 관계는 짜증과 분노가 자주 발생합니다.
참된 안식을 누리고 싶은데 마음이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혼자가 된 듯한 고독감과 이해받지 못한다는 소외감이 밀려들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나의 방황과 허물을 아시면서도 덮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완벽하고 싶었지만 늘 부족한 저희들입니다.
깨끗하고 자랑스런 삶을 살고 싶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저희들입니다.
우리가 연약해도 사랑해주시고, 잘못해도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해해주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도와주세요.
주님께 받은 은혜로 다른 사람을 그냥 좋아하게 해주세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참아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