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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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원인과 치유 (Causes and Cure for Lone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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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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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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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에 선포된 말씀) 2018년 2월 18일

외로움의 원인과 치유。
( 눅 7: 11 ~ 17 )

“오늘날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독이지요”라고(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사에서). 한국은
가족형태가 빠르게 변화하여, 이제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520만 가구를 넘었습니다. 이는 4인 가족,
2인 가족 형태보다 많습니다. 전 국민의 약 30%가 혼자 사는 가구입니다. 지난 25년 사이에 5배나
증가한 추세입니다. 가장 흔한, 가장 많은 가족형태가 된 것입니다. 이는 문화를 변화시켜서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여행하고, 혼자서 노는 문화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편리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외로움과 사회적 공동체성 결여, 그리고 다음 세대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어떨까요? 한국의 해외 거주 동포 중 재미동포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미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캘리포니아, LA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생명의 전화>
상담 사례를 분석했더니, 이민사회 한인들이 가장 많이 고통을 호소하는 문제가 고독과
외로움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털어놓고 의논할 곳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노인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영어가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 생활 양식의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노인들은 이민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이는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심리적으로는 무력감과 우울함을
느끼고, 이는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서 만성질환을 앓게 하는 것으로 연구 결과 나타났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나이가 많은 분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10대 청소년은 외로움으로 약물 중독에
빠집니다. 20대 유학생은 수 년 동안 한국 집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학을 마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신변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4,50대 중년들은 자신이 꿈 꿔 온 삶이 깨지거나 가정 파탄으로
허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족과 공동체는 생각보다 약합니다. 대인관계의 결속력은 공허와
박탈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직업 안정성은 약하고, 잦은 이동은 깊은 유대감을 맺지 못하게
만듭니다.
빠른 도시화, 치열한 경쟁 사회, 기계와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도대체 이런 위기와 고독은 언제부터,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던 때는
죄도 수치심도 외로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인간은 안정과 평안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던 자리에는 하나님 대신 돈과
명예욕과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병들어 있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해 보면, 그 마음
가운데서 위기를 불러오는 우상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살 때 활력을 찾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혼자 살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어도,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주님은 지금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한 여인을 위로하시면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1. 환경에 좌우되지 말라. 하나님은 ( 생명 )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눅7:12-13)

2

예수님이 성읍을 지나가실 때 한 무리의 장례 행렬이 시가를 가로질러 성문에 이르렀습니다.
한 젊은이가 죽었던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아들을 잃은 어미는 슬픔에 못 이겨 울고 있습니다.
옷은 다 찢겨 있습니다. 바닥에 주저 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 밖에 없던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시신이 된 아들을 이미 관에 넣었고, 이제 떠나 보내야 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떠나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친구들이 관을 들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나온 몇 몇 사람들이 장송곡을 연주합니다. 공허와 허탈감이 감돌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지켜 보셨습니다. 그 과부의 슬픔을 공감하셨습니다.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울지 말라고. 이 말은 단순히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위로하는 데
한계를 느낍니다. 깊은 슬픔,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인간을 만드신
분이고, 인간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만큼 능력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의사는 아무리 훌륭한 명의라고 하더라도 죽은 환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습니다.
환자의 숨이 멎고, 맥박이 끊어지면 돌아서고 맙니다. 죽어서 뻣뻣해진 시신을 붙들고
치료하겠다는 의사는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덤에 가서 기도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 멀쩡한 사람이라면 무덤에 누워 있는 시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 또한 예수님을 만났어도 내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앞으로 나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섭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죽은 망자의 영혼,
과부의 외아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눅7:14)
인간의 상식을 파괴하는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 예수님은 소망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며칠 전에 생명이 떠난 영혼에게,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던 영혼이 지금 빛이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어두움과 빛이 만났는데, 그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절망과
소망이 만났는데, 소망이 절망을 삼켜 버렸습니다. 죽음과 생명이 만나 충돌하자,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의 말씀에 죽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 오늘 불쌍한 사람이 한 명 죽었는데, 주님께서 이 사람을 살리실 수 있습니까?”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죽으면 끝이라는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께 이런 간청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겠습니다.
▶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죽은 영혼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외로움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이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다정한 관계를 회복하면 됩니다.
☞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까요?
이 과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습니까?
기도를 드렸습니까? 경건한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까? 헌금을 드렸습니까? 봉사와 희생을
했습니까?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를 불쌍하게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실제 현실입니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생명의 주인이시고, 인간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됨의 조건, 그것은 자유입니다. 자유가 있어야 인간다운

3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인간이지만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참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에는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혼자가 된 인간의 삶에는 자유와 행복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두려움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비참한 운명에 처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지금은
개인적으로 찾아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힌 사람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말과 위로를 듣고 싶은 고독한 사람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말씀합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3:20)
(사례) 저의 장인 어른은 약 19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6개월동안 경희대학병원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가족들은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기적처럼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많이 좋아지셔서, 미국에도 몇 차례나
다녀가셨습니다. 장인 어른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오는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내 몸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음의 소망은 언제나
하나님께 두고 사셨습니다. 저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아버님이 계셔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기도의 사명이 병상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 우리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변하는 환경에 따라 슬퍼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요동쳐도 의연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 자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는 이 말씀이 단순한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 하나님 )을 두려워하라.

“주님,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조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렘10:23)
장인 어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내내 저는 여러가지 상념에
잠겼습니다. 사람이 병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려는 사람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회복하려는
환자에게 회복할 힘이 없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조금 더
살아야 한다면, 그 연장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를 읽어보면, 한 가지 주제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거짓, 불의, 증오, 개인적인 결핍,
아픔, 이웃과의 갈등, 그리고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다. 구원(redemption)이란 이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는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벌써 죽음의 걸려 곧 이 세상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나는 그래도 90년 가까이 살아 왔어. 죽음의 고비가 수 없이 많았지만, 그
힘든 고비들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살아남았어.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 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힘겹게 살아온 삶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이제 얼마 안 있어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살아온 그 삶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모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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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시90:10)
또 다른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
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
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시49:9-10)
♡ 우리가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만드셨는지, 하나님은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나를 만드셨는지, 하나님은 나를 위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아야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죄 때문에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우리를 불쌍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자비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해도 사랑하고 못 해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건강해도 사랑하고 병들어도 사랑합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와 주고 싶어도 마음 뿐이지 도와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끙끙 앓고 있는 자식을 보면서 부모로서 대신 앓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었던 청년도
다시 살리고, 마음만 동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능력도 행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울지 말라고 말로도 위로해주시지만, 긍휼도 베푸십니다. 능력도 행하십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녀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묻지 않으십니다. 죽은 그 청년의 과거도 살피지 않습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향해서 인생 무상,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로만 위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권세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셨던 주님은 이제 죽은
자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의 펀치를 맞아 죄의식에 드러누워 있지만 말라는 것입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다고 해서 무기력의 늪, 좌절감의 늪에만 빠져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걸고, 그 상처 때문에 고통을 겪었어도,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진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고통을 당한 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 죽은 자를 살리셨던 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 우리가 병 드는 이유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측은하게,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다가올 나의 사건을 미리 예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패를 경험해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별의 아픔을 경험해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사는 사람에게 더 이상 외로움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 그림자가 사라지듯,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인생 전부가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 외로움의 원인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고, 외로움의 치유는 하나님과 다시 사랑에 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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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우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죽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아시고 동정해주실 뿐만 아니라 살려주신 하나님.
지금 저희 마음에 오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슬픔도 사라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병마가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 두려움의 감옥에서 저희를 구출하여 주시고,
빛과 소망의 나라로 옮겨 주소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심을 다시 한 번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에 쓸려다니지 않게 하시고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세요.
몸이 아픈 것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는 것도, 골치 아픈 문제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을 위해 축복하며 살게 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영생의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