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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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The Meaning behind the Holy Communion)

작성자
admin1
작성일
2017-12-03 17:20
조회
39
주일에 선포된 말씀 2017. 12. 3.
성찬의 의미

( 마 26: 17 ~ 29 )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산소입니다. 산소 공급이 3분 이상
중단되면 뇌세포가 정상기능을 유지할 수 없고, 5분이 지나면 뇌세포가 원상회복이 불가능할
상태로 파괴돼 죽음에 이릅니다. 두번째는 물입니다. 물을 연료로 불을 피우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3일 정도 굶을 수 있지만 하루라도
물을 마시지 않으면 고통을 느끼게 되고, 의식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체는 내부에 지방의
형태로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지만, 산소와 물은 저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구에
산소와 물이 충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세번째 중요한 것은 수면입니다. 수면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동물실험에 따르면 쥐에게 수면을 취하지 못하게 만들자 17일만에
죽어버리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네번째는 음식물입니다. 보통 사람은 하루에 세 번의 식사를
합니다. 균형있는 영양과 적절한 양도 필수입니다.

산소와 물, 수면과 음식 외에도 생명에 필요한 요소들이 많지만, 인류 역사에서 생명을 앗아간
대표적 요인들은 질병, 전쟁, 사고, 재해 등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모든 요인들의 뿌리에는
인간의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시작되었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삶이 끝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셨고,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값을, 죄가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속죄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며,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죽는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의 제사를 받으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계십니다.

♡ 성찬(The Lord’s Supper, A Holy Communion Service)이란 무엇일까요?
성찬이란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는 식탁을 의미합니다. 이 식사를 거룩한 성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사랑을 수용하며,
영생의 복을 받는 뜻 깊은 식사이기 때문에 성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찬의 시작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식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고전11:24-25) 따라서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와 찢기신 몸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느끼게 되며,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우리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자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찬에 참예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1. 죽음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 부활 )과 영생을 소망하며 살라.



예수님은 사는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10:15)

어느 중학교 남학생이 살았습니다. 그 학생 옆집에는 믿음이 좋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80세가 넘으셨지만 교회 한 번 빠지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이 학생을 참
귀여워해주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은혜롭지 못한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나는 빨리
죽어야 하는데. 빨리 죽어야지.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농담삼아서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어디 빨리 죽는 약 있으면 좋겠어.”
이 중학생은 할머니가 이런 말씀 하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타민 몇 알을 까만
봉지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갖다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 봉지에 있는 알약을 두 알씩, 세 번만 드시면 죽을 수 있데요. 할머니 드세요.”
그러자 이 믿음 좋은 할머니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이 학생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말로는 죽겠다고,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막상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싫어서, 삶에 너무
지쳐서, 확 죽어버리겠다는 것은 믿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만나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고, 고통속에서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주님의 성찬에 참여한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완벽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무엇이 가치있는 삶인지는
각 자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새 생명, 부활하게 될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지 않을 것입니다. 왜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까?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몰라서 내 감정이 가는 데로 살았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행하면서 살았지만 이제 다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이제는
거지처럼 살지 않습니다. 이제 욕망이 생긴다고 해도 죄 짓는 곳에는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누구인지, 자아정체성(Identity)이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입니다. 옛 것은 지났고 새 사람입니다. 맥주는 그대로지만 내 입맛은 변했습니다. 죄를
유혹하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 옛날의 내가 아닙니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지만 나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그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평화와 죄의식은 서로 반대편에 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모두 십자가에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 자신의 참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렸다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그 십자가에 내가 달렸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던
어느날, 설교를 듣던 어느날,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어느날, 십자가를 바라보니 거기에는 내가
달려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시던 주님께서 나 대신 그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습니다. 주님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끼면서 내가
지은 죄를 얼마나 가슴아파했는지 모릅니다.

♬ “주 십자가 못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2절)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3절)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송가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이제 내 인생에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면 아무거나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먹다 남은 찬밥이나 개밥도 좋다는 말입니까? 우리 몸이 어떤 몸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시고 살려주신 몸입니다. 아무 것이나 먹으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데, 아무 곳이나 다니면 안 됩니다. 술이나 담배, 마약같은
몸에 해로운 것을 마구 먹으면 안 됩니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됩니다. 아무데나 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됩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날마다
영적인 말씀을 먹고 삽니다.

☞ 우리는 멀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2.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 그리고 ( 화목 )하라. 주님이 죽으신 이유다.



『인생 수업』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가장 큰 도전이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대부분은 어렸을 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 도취나 이기주의와 혼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잘 맞는 짝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대개 ‘보상’에 불과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를 잘 하고, 할머니께 웃음을 보이고, 손을 자주 씻으면
‘사랑받을’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조건적인 가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사랑이 그토록 많은 것들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대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p.48-49)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도 내가 그리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맘에 들어 하실까?
-나도 내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탐탁하실까?
-사람들은 내 외모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데, 하나님도 마찬가지실거야~.

▶ 성찬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나를 좋아해 주셨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십니다.
내가 주님께 사랑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들려고 무엇인가를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조차 불쌍히 여기시고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을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더럽다고 느끼기도 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는 형벌을 받아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그 형벌을 받으려고 마지막 성찬식을 행하십니다. 이 마지막 식사 후에는 체포, 불법 재판, 십자가 처형, 그리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이 끔찍한 고통을 수용하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거울이 깨지듯,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를 변함없이 예전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내가 살았던 지난 날은 어떠했습니까? 빛이 없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방황했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행복하려면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쁘거나 멋있는 외모.
똑똑한 머리. 운동을 잘 하거나 용기가 있거나, 가진 것이 많아야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것을 가져보겠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원하던 것을 얻은 사람도 그것을 가져봐도 인생은 허무했습니다.

정태기목사님이 쓰신 책(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에 보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목사님의 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하고 욕심이 많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단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5명이 달리면 5등, 6명이 달리면 6등
을 했다고 합니다. 4학년 때, 추석 다음 날 운동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날 따라 어머니가 하얀 모시 한복을
차려 입고 운동회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이 꼴찌를 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어둑어둑할
무렵 집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일어서면서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꼴등 하는 새끼는 내 새끼가 아니니까 나가서 죽어 버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꼴등만 해서 기가 죽을 대로 죽어 있던 내 가슴에 어머니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고 합니다. 그는 정말로 죽어버리려고 한밤중까지 아무도 없는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동회가 다가오기만 하면 가슴이 한 없이 떨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내 몸이 이렇게 약해진 것은 다 어머니 때문이야~. 어머니가 그 때 그렇게 야단치지만 않았어도 나는
아마 운동을 좋아했을 거야. 그리고 운동을 좋아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몸이 약해지지 않았을 거구.’

미국 와서 공부하던 어느 날, 교수님이 눈을 감고 자기 식구들 중에 꼭 얘기하고 싶은 사람을 상상해 보라고
하더랍니다. 그 때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어머니께 원망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한 번도 말씀이 없으셨던 어머니가 상상의 독방에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태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그 순간 정태기목사님은 어머니가 자기를 등에 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내가 너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는 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에서 불이 나더라. 태기야, 내가 너를 그 날 심하게 야단친 것은 너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미안하구나, 얘야~”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날 교실 바닥에 엎드려서
피를 토하듯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님, 이 불효자식을 부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동봉하는 이 돈은 제가 여름방학 때 벌어서
부쳐 드리는 것이니 꼭 옷을 해 입으세요.” 어머니는 멀리 미국에서 보내온 아들의 그 편지를 부둥켜
안고 저녁마다 이불 속에서 우셨다고 합니다. 밖에서 울면 형님이 나무라니까. 그리고 노상 혼잣말로
되뇌이셨다고 합니다. “태기야, 용서라니. 용서가 다 뭐냐?” 어머니는 아들이 보내 온 돈으로 옷을
해 입으시고, 하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정태기 목사님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시를 썼습니다.
“어매(엄마) 어매(엄마) 우리 어매(엄마).
사랑하는 우리 어매.
이 세상 어디 가도 보고 싶은 우리 어매.
불러도 불러도 배고픈 어매 이름.

어매 없는 세상은 쓸쓸한 광야
허허 벌판 한가운데 서서
목이 터져라 어매를 부르면
창공은 어느 덧 어매 젖가슴
어매 품 안에서 주님을 만났네.”(pp.87~92)

♡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우리 각 자에게 건네 주시는 떡과 잔을 받아 마시면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은 그 많은 잘못과 죄를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해야 할 가족조차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를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용납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겠습니다.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 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해 주소서. ”



[ 기 도 ]


하나님,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전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로만 들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런 저를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받고 있는 이 사랑으로
이제부터 저 자신도 사랑하게 해주소서.
가족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도와주소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이해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이해하게 도와 주소서.

죽음 앞에서도 부활을 소망하고
나의 이 부족한 모습도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