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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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은 행복을 낳는다(A good encounter leads to happiness)

작성자
admin1
작성일
2017-11-26 11:41
조회
185
설교원고 2017. 11. 26.
좋은 만남은 행복을 낳는다

( 요한 1: 35 ~ 42 )


인생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는 않지만 정직합니다.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둡니다. 좋은 만남은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고, 나쁜 만남은 불행을 만듭니다. 좋은 만남은 우리를 깨닫게 해주고, 믿음을 성장시켜주며,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줍니다. 그러나 나쁜 만남은 나쁜 말을 전하고, 우리를 시험들게 하며, 의심과 불신을
키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쁜 만남을 가지고 나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곤 한다는 점입니다. 나쁜 짓을
하고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7:17-18)고 하십니다.

(사례) 1880년, 미국에서 태어나 세상에 태어난 지 9개월만에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고,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던 여자 아이. 그러나 20세기의 기적이라 불리는 위대한 인물이 된 헬렌 켈러!
그녀 자신의 말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헬렌을, 전 세계가 손꼽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앤 설리번 선생이다. 언젠가 헬렌 켈러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수놓은 사람들이다. 친구들은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내가 지닌 한계를 변화시켜 아름다운 특권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상실의
그림자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행복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친구들 중 최고의
친구이자 스승이 설리번 선생이다.”

암울한 어린 시절, 늘 제멋대로였던 헬렌에게 사랑과 인내로 말과 글을 가르치고, 인생의 참
의미를 깨우쳐주었던 설리번 선생은, ‘물’이라는 말 한 마디를 헬렌에게서 얻기 위해 7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쏟았다. 말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7년 만에 얻은 짧은 단어 하나였지만 이 귀한
시작은 스무 살의 헬렌이 하버드대학에 진학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설리번 선생의 사랑과
인내는 헬렌 켈러가 세계 최고의 학부를 마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이 기적적인 일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시작과 실패를 계속하라.” 설리번 선생은 헬렌 켈러에게 늘
강조하였던 이 말은 실패에 익숙해있던 헬렌 켈러에게 희망을 주었다. 헬렌 켈러는 참으로 귀한
친구이며 스승이었던 설리번 선생에게서 얻은 인생의 참 의미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과 나누는 삶을 살다가 1968년 숨을 거두었다. (존 맥스웰, 내 인생의 친구. 출판사
가치창조, p. 20~22)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안드레가 있습니다. 안드레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죄에 빠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인지,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희망을 주고, 죽어가는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인지,
안드레는 그러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위대한 만남은 그의 형 시몬을 전도하게 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소(메시야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말이다).”(요1:40~42)

☞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좋은 만남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좋은 만남은 다음의 두 가지 행복과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1. 좋은 만남은 내가 누구인지, 진정한 ( 자아 )를 깨닫게 해준다.


베드로는 본래 이름이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이란 흔들리는 갈대라는 의미를 지녔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앞으로 베드로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높은 빌딩을 지으려면 반석같은 고정된 지반이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 위에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를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나를 대하는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의 시선입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말은 부정적인 말이 많습니다.
특히 상처와 열등감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욱 부정적으로 해석됩니다. 말은 전해주는 사람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백악관과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말을 전해주는 대변인이 있습니다. 이 대변인이 국민들과 대통령이 소통이 잘 되도록 도와줍니다.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이해가 잘 되도록 해주는 것이죠.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대변인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무지합니다. 잘못을 해놓고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빌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십니다.
우리가 할 말을 예수님이 하나님께 대신 해줍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우리 사이에서 중보자, 화해자 역할을 하시는 것이지요. 다리를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말을 전달하다가 양쪽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을 때가 있습니다. 긴 상황의 말을 짧게 요약해서 전달하다 보니,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는 불신을 낳습니다. 불신은 우리의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악화된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떨어뜨립니다. 식어진 믿음은 행복을 앗아가고 불행을 낳습니다.

안드레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놀라운 진실,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형에게 전했습니다. 자신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형에게도 이런 행복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바르게 전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려는 의도입니다. 우리와 화목하게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좋은 계획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29:11~13)

☞ 여러분은 ‘주님을 모신 기쁨’을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세워 놓으신 계획이 선하고 좋은 계획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과 진실한 대화를 나눕니다.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베드로는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사람들이 내게 심어준 말은 부정적인 말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뭘 배웠느냐고? 학벌이 있느냐고? 베드로가 돈을 벌었느냐고? 그가 성공한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베드로에게 직업을 묻습니다. 그 누구도 베드로의 중심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만드신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물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서 장차 반석 같은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를 그렇게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정신사의 강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던 잠재능력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안 돼~.” 그리고 이유를 갔다가 붙입니다. 저 사람은 귀신이 들렸잖아. 저 사람은 허리가 굽은 곱추니까 안 돼. 저 사람은 배우지 못해서 쓸모가 없어.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쓸모 없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쓸모 없다고 버려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서 위대한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38년 동안 아무 쓸모 없이 버려진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절에 그 사람을 찾아가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를 치유하십니다.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는 안 될까요? 우리의 상처는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지 못하실까요?




2. 좋은 만남은 사람이 아니라, ( 하나님 )을 바라보며 살도록 해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1:39)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제자에게 예수님께 가서 그의 제자가 되라고 합니다. 훌륭한 세례 요한 아닙니까? 나를 존경하고 나에게서 배우려는 사람을 나보다 더 훌륭한 분에게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에게는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비우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님만을 높이려는 숭고한 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좋은 만남이란 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이런 면에서 좋은 만남입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내 신앙을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를 순원에게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성령님께서 각 자에게 임하셔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만남은 나를 영원토록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주님을 만나 그 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고,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평안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행복이 지속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모신 기쁨을 생활에서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모신 기쁨,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지 못하고, 서로가 들은 말, 가십을 전하고 상처를 전합니다. 사람의 말을 예수님의 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배움입니다. 사람은 배움을 통해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배움을 통해서 터득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미래, 보다 나은 삶,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하나님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서 자유를 주셨고, 광야로 인도하신 후 40년 동안 교육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움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12살 때 성전으로 스승님을 찾아갔습니다. 성전에서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배우셨습니다. 경청하고 질문하는 것을 통해 사람은 지혜를 얻습니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눅2:46) 배움에 있어서 잘 듣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삶이 엉망으로 망가진 분들의 공통점은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승님의 말도, 친구의 말도,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우자의 말을 듣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의 말을 듣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마다 들으면서, 그 말씀의 거울로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질문은 호기심을 낳고 충족합니다. 그러면 성장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 예수님께서도 배움을 통해 성장하셨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합시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이런 말을 하고 또 들어왔습니다. 경청하고 질문하는 배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우셨고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눅2:52)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회성, 관계성, 인성이 성장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려는 사람, 겸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겸손하게 배우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그들에게 오셨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자기들 손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죽일만큼 미워한 것이지요.

왜 그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자신의 구부러진 마음을 바로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교만의 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체면, 자기 우월감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말씀은 들었지만, 자신의 귀에는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지만 들려지는 축복이 임하는 분들이 있고, 들려지지 않는 완고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구부러지면 모든 것이 비뚤고 구부러지게 보입니다. 매사에 비판적이고 비관적입니다.

사례) 몇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이것으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대꾸합니다.
-“하나님은 도둑이구만~. 왜 남자를 잠재워 놓고 갈빗대를 훔치누?”
이 말을 들은 그 옆 사람이 잠시 후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매일 들어도 좋겠다. 갈빗대 하나만 가져가고 대신 여자를 남겨 주었으니까~.”

마음이 바른 사람은 똑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해석을 바르게 합니다. 긍정적입니다. 은혜롭습니다.
덕을 끼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은 칭찬을 해주어도 아첨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충고를 해주면 자신을 멸시한다고 해석합니다. 위로를 해주면 비웃습니다. 구부러진 마음에는 말씀의 빛이 굴절 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깨진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듯, 말씀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까지도 이상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좋은 만남을 주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삼고, 자신은 조연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 높이고,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 역할만으로도 기뻐했습니다.

안드레도 좋은 만남을 주선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만났다는 축복을 자신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자기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
시켜 주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준 사람. 이런 사람보다 더 귀한 분은 없습니다.

적용)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를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를 홍보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되면, 그 직분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시켜 주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장로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려고 해야 합니다. 권사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 좋은 만남은 사람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만남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라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대림절은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촛불을 켜놓고 간절히 기다립니다. 한 주 한 주, 하루 하루를 기다립니다.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기다릴 자격이 있다는 것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요14:1~3)

우리는 스포켄에서 살면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를 존중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를 존중합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를 용서합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행복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좋은 만남이 좋은 결과를 낳고, 행복을 만든다는 것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좋은 만남들로 이어지게 해주세요.
나를 만난 우리 자녀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시고
나를 만난 이웃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가게 하여 주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살게 하여 주소서.
우리를 주 안에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